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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마홀 무념산책> (33)
포천 현감 토정 이지함 (2)
기사입력: 2020/06/19 [11:45]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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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시민평론가

말년에 이지함은 (1578년) 아산현감에 제수되어 근무하면서 임금에게 제수하는 잉어양식 호수를 메워 농사를 짓고, 걸인청(乞人廳)을 세우는 등 전 보다는 실천적으로 백성 구휼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현민들은 그의 죽음을 마치 자신들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도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걸인청은 단순히 걸인을 거두는 곳이 아니고, 걸인들에게 삶의 의지를 다시 심어주고 재활의 기회를 주는 기관으로 걸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상업을 가르치는 기관이 되었다. 현대판 복지기구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의 실천적 개혁의지나 사상과 업적은 실로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율곡 이이도 그를 높이 평가 했으며 그는 실학의 선구자로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가 솥단지를 쓰고 길거리에 눕는등 기행을 보였고, 마포 나루 근처에 (현재 마포구 토정로) 땅굴을 만들고 흙집을 짖고 사는 등 이해하기 힘든 행태를 보였으므로, 그의 학문과 사상을 얕잡아 보는 것은 잘 못이라고 보여 진다. 만일 그가 그런 기행을 보이지 않고 직선적으로 그의 사상을 주장하고, 조정에 나가서 정치 실현을 시도 했다면, 아마 그도 무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이 업적은 남겼지만 정치판에서 밀려난 예는 수없이 많았다. 역사의 문외한인 본인 사견으로는 토정비결이나 토정유고 등이 그가 죽은 후에 세상에 알려진 것도 아마 눈에 보이는 정치적 업적을 남기려는 의욕보다는 사상을 남기고자했던 의도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는 현실 정치에 나서기 보다는 그의 사상을 정리하기 위하여 천시하는 상업에 뛰어 들어서 실전적 경험도 익히고, 상업을 통한 이익을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주었으며, 상업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정리할 시간을 중시하고, 그 시간을 적절하게 사용 했던 것 같다. 그가 포천 해룡산 암자에서 상당기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가 후손들에게 “내 생전에는 이 글들을 세상에 내놓지 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의 사상은 훗날 유형원 박제가등 많은 조선 중 후기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다. 

 

야사에선 이지함이 죽기 전 백성들을 착취하던 아전이 이지함에게 발각된 일이 있었고, 주변에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이지함이 가볍게 처벌하는 등 덕을 베풀었지만, 오히려 앙심을 풀고 이지함의 죽음에 크게 관여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출간 했다는 사실 만으로 그의 저술이 아니라고 인정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있다. 어쩌면 이지함의 여러 가지 유필을 후손이 모아 제본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남사고 비결”, "북창 비결" 등 예언서들이 나와서 암담한 현실 저 너머에 펼쳐질 미래를 그려 본 저서들이 있었음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연암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은 이지함을 주인공 허생의 모델로 설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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