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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마홀 무념산책(29)
옥병서원에 올라 박순 선생을 기리다
기사입력: 2020/03/26 [10:50]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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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시민평론가

포천의 옥병서원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서원이다. 1658년 효종 9년에 사암 박순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1680년 숙종 6년에 박순 영정을 봉안했다. 또 숙종 24년 동은 이의건과 문곡 김수항 두 분을 추가 배향하고 숙종 39년 ‘옥병’(玉屛)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후 김성대, 이화보, 윤봉양 등 모두 여섯 분을 배향 한 사당이다. 6.2 5전쟁으로 영당마저 잿더미가 되었으나, 1987년에 모두 복원됐다.


박순은 절개 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박순은 1556년에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로 근무 당시, 문정왕후 소생인의혜공주의 밀수 현장을 적발하고 밀수품을 모두 압수하는 강직성을 보였다. 당시 문정왕후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한 후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 기간 동안 아무리 아들이지만 명색이 왕인 명종을 회초리질을 하고 뺨도 때렸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였다.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국사를 좌지우지했다.
문정왕후는 여왕과 같은 위치에 있었고, 그런 사람의 딸인 의혜공주의 물건을 적발하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무렵 홍문관에서 임백녕의 시호를 정해 올리라는 명이 내려왔다. 임백녕은 154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던 도중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윤원형 등과 함께 명종을 추대하여 공을 세우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 선비들을 죽였던 인물이다.


당시 조정은 윤원형의 소윤파가 득세하고 있었고, 임백녕에게 큰 명예가 주어질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박순은 분연히 반대하여 낮은 등급의 시호를 올렸다. 윤원형은 박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중죄로 다스리려 했으나, 여론에 밀려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켜 축출시켰다. 명종17년인 1562년 파직되었으나, 1563년에 성균관 사성으로 복직하였다.

 

박순은 현실 정치에서도 남다른 추진력과 기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관직에 있는 여러 대신들과 협력하여,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켜 조선사회에 사림의 입지를 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숙으로, 문정왕후의 배경을 이용하여 막강한 정치적 입지를 쌓은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였고, 그 가솔들은 약탈, 살인, 강간 등을 저질러 사회에 큰 무리를 빚었다.
조정대신들은 1565년 윤원형과 정난정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서를 여러 번 올렸고, 문정왕후 사후 입지가 약해졌던 윤원형은 그해 11월 18일에 경기도 강음현에서 정난정과 함께 약을 먹고 자결했다.


박순은 1568년에 홍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고 이황은 제학이 되었다. 이에 박순은 왕에게 이황이 자기 대신 대제학이 되어야 한다고 자리를 바꾸어줄것을 청했다. 박순은 14년간 정승을 지냈다. 1586년 박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창수면의 백운계곡에 배견와라는 초가를 짓고 살면서 시골 노인들과 더불어 온유하고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박순 선생의 자료를 접하면서 필자는 절로 나오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일생을 대쪽같은 선비로서 당당하고 담대하며 초연한 삶을 살았다. 을사, 정미사화를 겪으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정치 현실에 맞서서 당당하게 처신하며 살았던 몇 되지 않는 훌륭한 정치인이었다. 또 그런 격랑 속에서도 풍유를 즐기며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박순 선생의 일생이 지금의 우리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옥병서원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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