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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마홀 무념산책(27) 인흥군묘
인흥군 묘계비는 중요한 한글 연구 자료
기사입력: 2020/02/10 [14:18]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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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시민평론가
▲     ©포천뉴스

포천시 신읍에서 국도 43호선을 타고 영중면 방면으로 가다가 영중중학교 입구를 조금 지나 우측으로 들어서서 ‘능원 낚시터’까지 가면, 낚시터 저수지 위편 언덕에 인흥군 묘 및 신도비가 있다. 이곳은 한때 행정구역상 북한에 속했던 곳이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1604~1651]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다. 선조의 열두 번째 아들이고 7세 때인 1610년(광해군 2년) 인흥군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 광해군(光海君)에게 미움을 받아 스승을 두지 못하고 형인 인성군 공(1588~1628년)에게 공부를 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이괄과 연관설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인흥군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1649년(효종 즉위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서 국방문제와 척화파 기용에 대한 외교문제를 해결하였다. 인흥군의 묘는 1986년 4월 포천시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인흥군 묘는 부인 송씨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봉분 하단에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 뒤편으로는 기와지붕의 곡장(曲墻)을 둘렀다. 곡장 아랫단에는 상석·향로석·장명등·양석(洋石) 등을 배치하였고, 양관조복(梁冠朝服)의 문인석은 더 떨어진 아래쪽에 자리 잡았다. 봉분 앞에 묘비가 세워져 있고 두 개의 신도비가 있다.


인흥군 묘역 전방 왼쪽 20m 떨어져 자리한 말각방부형(末角方趺形) 대리석제 신도비는  1655년에 세웠다.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인흥군의 아들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俁)가 글씨와 전액을 맡았다. 인흥군 묘에서 약 100m 떨어져 세운 또 하나의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낭선군이 글씨를 써서 1682년에 세웠다. 귀부와 옥개석을 갖춘 옥개 귀부형이다.


신도비 앞쪽으로 얼굴 모양이 조금 특이한 문인석 두 개가 서있다. 다른 묘와 달리 석등 묘계비 등에 물고기 모양이나 기타 문양이 많은 것이 이 묘역의 특징이다. 인흥군의 아들 낭선군이 당대의 서예가이므로 그가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묘계비다. 묘계비에는 한글 고어체로 ‘이비가극 히녕검하 니성심도 사람이거 오디말라’ 라는 문구가 적혀있는데, 이 문구는 고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시대 유적에서 간간이 언문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한글이 상당히 널리 퍼져있었다는 반증이다.


유사한 유물로는 서울 노원구에는 '이윤탁 한글 영비'(1536년)가 있다. 무덤 옆에 있는 이 비석에는 '신령한 비석이니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화를 입는다.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린다'라고 새겨져 있다. 또 문경새재에는 18세기 표기법으로 '산불조심'이라 새긴 표석이 있고, 경남 진주 의곡사에는 한문을 음독해 새긴 비석(1916년)이 있다.


1490년 성종 때에는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출간됐다. 효자, 충신, 열녀 각 35명을 그림과 한자, 그리고 언문으로 소개한 책이다. 세간에 잘 알려진 '새끼손가락 잘라 피를 먹여 아비 살린 아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아녀자' 이야기 등이 이 책에 들어 있다.


조선 정부는 삼강행실 언해 작업을 경국대전에 규정해 모범적인 백성을 포상하라고 규정했다. 사림파가 권력을 잡았던 중종 때는 한 번에 약 3천부를 인쇄하여 전국에 뿌리기도 하였다.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개혁적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한문 문자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한글은 차별적인 대접을 받았지만 한글의 우수한 효율성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때문에 한글은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상류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젊은 사람들 간에 한글 편지를 많이 사용했다. 또 여성들을 위한 책은 주로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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