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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사, 신라의 문필가 고운 최치원 모신 사당
기사입력: 2019/10/07 [10:09]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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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현덕 시민논객 

1975년 9월 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된 청성사는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을 제향한 사당이다. 최치원은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했고,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 교육을 담당하던 관리인 현위(縣尉)를 거쳐 관리들의 감찰을 담당하는 시어사 등을 역임했다.

 

최치원은 879년 ‘황소의 난’(874–884) 중에는 명문 토황소격문을 써서 적의 사기를 꺾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문장력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885년(헌강왕 11년)에 귀국한 그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을 맡았다. 

 

진성여왕 3년인 889년, 농민들이 봉기해 전국은 내란 상태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원종과 애노의 난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이 신라 패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891년 양길과 궁예가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혼란기의 신라를 구하고자 노력 했으나, 패륜으로 비난 받던 진성여왕은 기존 보수 세력의 완강한 저항을 수습하지 못했다. 

 

‘시무 10조’는 왕궁 이전, 왕과 관리의 자세, 사치와 고리대금업 배척, 세제개혁, 토지개혁, 승려의 정치관여 배제 등 사회 전반에 맑은 기운을 세워서 나라를 바로 잡자는 건의 사항이었다.

 

이 안을 성공적으로 시행됐다면, 국내 정치는 안정되고 농민들의 불만은 진정됐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궁예나 견원의 등장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운이 다하여 기득권층인 보수 세력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최치원은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많다고 탄식했다. 그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란과 파괴를 지켜보며, 당나라에서의 처참했던 상황을 회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향후 사태가 얼마나 더 참담하게 진전될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908년 이후 최치원의 행적은 전혀 알려진 게 없다.

 

당시는 국제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현실을 잘 아는 그는 더 이상 용기를 내어 무리수를 두느니, 차라리 초야로 들어가야 하겠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당나라는 비슷한 시기에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황소의 난’으로 당시 장안과 낙양이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명망의 길에 들어섰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 926년에 망할 때까지 228년간 한반도 동북부와 만주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은 대국이었으나, 수년간에 걸친 화산 활동과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던 끝에 국가가 해체되었다.

 

최치원은 국내외의 혼란 속에서 신음하는 민초들을 보며 관의 횡포와 빈곤에서 그들을 구하려 했으나, 골수까지 썩은 신라를 되살리기 어렵다는 것을 예측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새로운 신진 세력이 등장해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화랑의 후예로서 국가를 버릴 수 없으니, 차라리 조용히 초야로 사라진 최치원. 그는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왕건이 부각되기 20년이나 앞서서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고, 곡령(고려)은 푸른 소나무’라고 설파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함께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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