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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마홀 무념 산책
기사입력: 2018/07/09 [16:31]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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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천뉴스

해룡산주변

 

천천히 선단동에 위치한 해룡산으로 가보자. 조선 시대 사냥하며 무예를 닦던 강무(講武) 행사와 기우제를 올린 일도 있다고 한다. 국내외에 해룡산이 여럿 있으나 포천의 해룡산이 대표적이라 한다. 이천의 해룡산도 임금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공식적 행사가 있었다 한다.

 

이곳은 조선조 3대 명문으로 불리우는 서씨 가문을 이르킨 약봉 서성선생의 유택이 있다. 유택은 욍방산, 천주산과 수원산의 삼봉을 아우르는 꼭지점 같은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대구서씨 문중의 중요 인물인 약봉 서성선생은 청렴결백하고 아래 사람에게 거만하지 않고 문무가 뛰어난 분으로 역사에 기록된 대단한 분이다.

 

약봉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약봉이 어렸을 때 외지에서 병사 했다고 한다. 약봉의 어머니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쉬어갈 곳을 찾았다. 이때  커다란 기와집이 보였고, 집 주인에게 청하여 하루 묵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기와집이 아니고, 야산의 풀밭이었다. 길을 떠나기 위해 유골이든 관을 들려했으나, 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관을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다 모시기로 하고 땅을 파니 훈훈한 기운이 감도는  혈토였다고 한다. 신이 눈 먼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하여 명당을 잡아 주었구나 생각하고 이 곳에 유택을 마련 하였다고 한다 이후 서성 선생이 돌아가시고 묘를 쓰는데 지관이 정한 명당자리에 돌이 막혀 문제가 됬다. 할 수 없이  후일 이장하기로 하고 묘를 쓰려느데, 장례 전날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깨졌다고 한다. 그 바위를 벼락바위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약봉 서성선생을 키운 고성 이씨 부인은 조선조의 대표적인 어머니로 추앙되어왔다. 이씨 부인은 안동(安東) 임청각(臨淸閣) 주인 명(洺)의 손녀(孫女)이고, 청풍군수(淸風郡守) 고(股)의 딸이다. 어릴 때 병으로 실명(失明) 하였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던 함재 서해와 결혼 하였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함재 서해는 신부가 장님인 줄도 모르고 결혼 길에 나섰다. 뒤 늦게서야 신부가 실명했다는 것을 알고 동행한 친지들이 파혼을 권유하였다. 그렇지만 서해는 파혼하는 경우 신부의 압날을 우려하며, 이에 개의치 않고 결혼했다 한다.

 

서해와 이씨 부인은 안동 망호리 친정에서 지어준 소호헌(蘇湖軒 : 보물제475호)에 살면서 아들 약봉(藥峯) 서성(徐渻)을 낳았다. 남편 함재공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당시 서성의 나이 2살이었다.

 

이씨 부인은 그의 뛰어난 결단력과 교육의지를 평가하여 현모(賢母)라고 불리고 있다. 현모(賢母)는 “시골 소호에서는 아들의 장래를 기약(期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두 돌된 아들을 데리고 함재공의 형님이 살고 있는 서울 약현동(藥峴洞)으로 이사하여, 아들을 중부(仲父) 춘헌공(春軒公) 서엄(徐崦)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현모는 이사한 후 새 집을 지으면서 친정집을 본떠 엄청나게 큰집을 지었다. "식구도 단촐 한데 웬 집을 이렇게 크게 짓느냐"며 이웃의 화제꺼리가 되었다. 이에 부인이 대답하기를 "우리 집안이 후일 반드시 창성(昌盛)하여 수 십 년 지나 면 이 집도 협소(狹小)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과연 자손이 크게  창성하여 현모의 예측이 맞았다.

 

아들 약봉(藥峯)은 6도의 관찰사(觀察使)와 5조의 판서, 의정부참찬(議政府 參贊), 숭록대부(崇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를 지냈고, 손자가 모두 영달(榮達)하여 첫째 경우(景雨)는 우의정(右議政)이요, 넷째 경주(景주)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경주의 후손에서 3대 정승, 3대 대제학이 배출되었다. 이 때  지은 집의 위치는 중구 중림동 약현성당(藥峴聖堂)이 있는 자리로 330여년 동안 종가(宗家)로 전해왔다.

 

약봉(藥峯)의 7대손 실학자 서유구(徐有榘)는 저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약봉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앞 못 보는 청맹(靑盲)으로 홀로 살림을 꾸려 나갔다. 음식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청주(淸酒)를 빚고, 찰밥과 유밀과(油密果)를 만들어 이웃을 초청하여 손님께 접대를 하니, 그 솜씨가 너무 좋아 훗날 아들이 명성을 얻게 되면서, 『청주(淸酒)를 약봉(藥峯)이 만든 술, 약현(藥峴)에서 만들어진 술이란』뜻에서 약산춘(藥山春) 또는 약주(藥酒)라 부르게 되었다." 고 기록하였다. 약산춘(藥山春)은 숙성기간이 길며, 물 누룩(水麴)을 써서 여러번 빚어 만드는 섬세한 솜씨와 비법을 필요로 한다. 이후 이씨부인 (이씨부인: 서성(徐渻)의 어머니)이 만든 고급약주는 선조(宣祖)가 즐기는 어주(御酒)로,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후일 아버지 함재공(涵齋公)의 묘표(墓表)에,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성품이 정숙하고 굳건하여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法度)가 있었고, 자손을 가르치시되 반드시 바름으로 가르쳤으니 친척과 이웃마을이 그 지절(志節)에 감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약봉 서생의 후손으로는 대과급제자 143명, 상신(相臣) 9명, 대제학(大提學) 6명, 판서(判書) 30여명, 무과급제자 119명이 배출되었다 한다.  고성 이씨 부인은 서씨가문(徐氏家門)의 현달(賢達)과 벌열(閥閱)을 위해 부단한 노력과 헌신으로 일생을 살아오면서 명문가(名門家)의 토양을 일구어낸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여인으로, 조선의 현모(賢母)이며, 대구서문(大丘徐門) 딸들에게 영원한 귀감(龜鑑)이요, 만대의 종부(宗婦)로 추앙(推仰)을 받고 있다. ( 출처 포천 문화원 자료와 대구서씨 문중 분의 구전 이야기를 재 정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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